지난 10여년 간 수많은 국가에서 잊혀진 것이 있습니다. 급속도로 에너지 전환을 추진하느라 상대적으로 ‘에너지 안보’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에너지 비용과 경제성에 대해서도 소홀했습니다. 2050년의 탄소중립 목표를 2030년으로 앞당기려다 더 많은 위기가 찾아올 것입니다.
세계적인 에너지 석학인 다니엘 예르긴 S&P글로벌 부회장은 6일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2022 조선비즈 미래에너지포럼’ 기조연설에 나서 “우리는 지금의 에너지 위기 시작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생각하는데, 위기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액화천연가스(LNG)와 석탄 수요가 급증하며 가격이 상승했고 세계 석유 시장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며 “코로나19에 따른 경기 회복이 시작되면서 수요가 예상보다 훨씬 높았고, 지난 몇년간 에너지 자원에 대한 투자도 부족했다”고 말했다.
예르긴 부회장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에너지-국제 관계 전문가로 꼽힌다. 10년 전 석유를 둘러싼 부와 권력의 탄생, 국제사회의 갈등과 충돌을 분석한 책 ‘황금의 샘(The Prize)’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미국외교협회 이사와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클린턴부터 트럼프까지 미국 4개 행정부에서 연달아 에너지 자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예르긴 부회장은 에너지 자원 투자가 줄어든 이유에 대해 세계적으로 신재생 에너지 전환 목표가 과도하게 설정되면서 기존 화석 에너지 투자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는 다소 (신재생 에너지 전환) 목표를 낮출 필요가 있다”며 “현재 전 세계 95조달러(12경4307조원)의 에너지 시장을 2050년까지 전부 신재생 에너지로 전환하고, 2030년까지는 그 절반을 전환하겠다고 한다. 야심을 조금 줄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예르긴은 지금의 에너지 위기가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예르긴 부회장은 현재 에너지 위기와 1970년대 오일 쇼크와는 차이점이 있다며 “1970년대 당시 위기는 석유에 국한돼있었지만, 현재 위기는 천연가스, 석탄까지 포함돼있다”고 말했다.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속 물가급등)으로 세계 경제가 대혼란에 빠졌던 1970년대 오일쇼크보다 현재 에너지 위기가 더 심각하다고 진단한 것이다.
그는 지난해 하반기 시작된 에너지 위기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지정학적 위기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 석유 시장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며 “글로벌 석유 시장은 파편화돼 전 세계 석유 공급의 20%는 사용이 불가능하거나 제재로 인해 판매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갈등이 유럽과 동남아시아 등으로 번지면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더욱 재조명될 것이라고도 했다.
예르긴 부회장은 원자력발전이 없다면 한국이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탈원전을 추진하는 독일을 예로 들어 “그 결정에 대해 독일인들이 크게 후회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독일 정부 관계자들이 탈원전으로 러시아 천연가스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됐다고 말한다”며 “이는 전략적 실책으로 여겨지고 있다. 환경 운동가들조차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신규 원전 6기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했고 8기를 추가로 검토하고 있다”며 “전 세계에서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원자력은 에너지 믹스의 중요한 요소”라며 “원자력을 지속하겠다는 약속이 한국 에너지 안보에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예르긴은 신재생 에너지 전환 정책이 다른 원자재 가격의 폭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는 지난 8개월 동안 구리에 대한 미래 수요 예측을 연구했다고 소개하며 “세계 경제가 빠른 전기화에 필요한 공급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향후 구리에 대한 수요를 합산해보니 전기차, 해상풍력, 육상풍력, 태양광 등에서 “정말 충격적인” 수요가 발생할 것이라고 했다.
구리는 신재생 에너지의 핵심 재료로 사용되는데, 세계적으로 신재생 에너지 전환 목표가 과도하게 설정되면서 구리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는 의미다. 그는 구리 수요 증가와 관련해 “앞으로 마주할 위기는 상당히 놀랄 수준”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현재의 국제 경제 체제는 거대하고 복잡하며 2050년의 상황에 대해 전부 파악하지 못한다”며 “(신재생에너지 전환) 목표를 적절한 수준으로 재설정하면서 에너지의 미래를 생각하며 기후 대응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예르긴은 현재 글로벌 석유 시장이 위험 수준에 도달했으며, 공급의 증가가 충분하지 않아 더 많은 혼란이 찾아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러시아의 석유 생산량이 줄어 하루에 약 200만 배럴이 감소할 것이고, 약 150만 배럴의 이란산 원유도 시장에 풀리지 못할 것으로 전망했다. 또 중동에서 공급 가능한 석유량에 대해 과대평가할 가능성도 분명 존재한다고 했다. 중동의 유휴 석유 생산 능력이 줄어든다면 시장의 긴장은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했다.
예르긴은 수소 경제가 향후 에너지 전환의 핵심 요소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수소 가치사슬이 이제 시작하는 단계로 뛰어난 엔지니어링 역량을 가진 한국은 그 안에서 글로벌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이 (지금의 에너지 위기에) 적응할 것이며, 시장도 조정을 거칠 것”이라며 “한국 기업들은 예전처럼 난제에 부딪히겠지만, 이번 조정 과정에서 계속 글로벌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이를 위해선 유연성과 적응 능력이 핵심”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