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日·EU, 비슷한 시기 일제히 표준 전략 발표
첨단산업 기술 패권 잡기 위한 표준 선점 경쟁 치열
韓정부도 ‘첨단산업 국가표준 전략’ 곧 발표
“미래 기술 주도권 잡기 위해선 표준 적극 활용해야”
[편집자주]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주요 국가들이 첨단기술 분야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인공지능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전환, 탄소중립으로 대표되는 녹색 전환, 경제 안보를 내세운 공급망 재구축 등 세계 경제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전선은 날로 확대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들 전장의 최전선에 ‘표준’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호환성을 목표로 만들어진 ‘표준’이 경쟁상대의 시장 진입을 막는 장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첨단산업 표준 경쟁에서 도태된다는 것은 기술 우위를 빼앗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술 대한민국의 첨단산업 표준전략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조선비즈는 국가기술표준원, 한국표준협회와 함께 한국의 표준 현황을 점검하고, 신전략을 모색한다.

지난해 5월 미국 정부는 기술 표준 주도권 확보가 필요한 통신, 반도체, AI 등 주요 8대 분야에 대한 ‘핵심 신기술 국가표준 전략(US Government National Standards Strategy for Critical and Emerging Technologies)’을 발표했다.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주도해 발표한 미국의 국가표준 전략에는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의지가 대거 반영됐다. 백악관은 국가표준 전략에서 “중국이 자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중국의 표준에 대한 타국의 지지를 유도 또는 강요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미국은 동맹국 및 파트너와 함께 기술적 장점과 공정한 절차를 기반으로 국제표준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중국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미국의 표준정책 발표 3개월 후인 8월, 중국은 신산업 표준화 방안(China Standards 2035)을 발표했다. 2025년까지 8대 신흥산업과 9대 미래산업 분야의 표준을 마련해 발표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일본은 같은 해 6월 범부처 과학기술 및 혁신 정책을 구체화한 통합혁신전략 추진 방안을 수립했다. 양자기술, 통신, 반도체 등 첨단 분야 R&D 과정에서 국제표준화 방안을 제시하도록 해 표준을 통한 기술의 상용화를 촉진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일본의 표준 전략은 그동안 ‘표준 수용 국가(rule taker)’의 위치에서 ‘표준 개발국가(rule maker)’로 전환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EU는 이보다 앞선 2022년 3월 ‘EU 표준화 전략’을 수립하고, 첨단기술 분야의 전략적 표준화 우선순위를 선정했다.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주요 국가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시기에 표준 전략을 발표한 까닭은 무엇일까. 진종욱 국가기술표준원 원장은 14일 “R&D를 통해 확보한 자국의 기술 경쟁력을 국제 표준으로 삼아 기술 우위를 계속 유지하려는 것”이라며 “표준이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 반도체 패권 경쟁, AI 국제 표준 경쟁으로 이어져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하면서 세상의 변화도 빨라지고 있다. 2017년 디지털 기술 및 서비스 시장의 규모는 1조달러 수준에 그쳤으나, 2026년에는 3조4000억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 분야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AI 산업에 대한 표준 수립이 세계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세계 최대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인 스포티파이가 가입자 100만명을 모으는 데 150일이 걸렸다. 인스타그램은 75일이 걸렸다. 하지만 챗GPT는 고작 5일이 걸렸다”라며 “이러한 급성장은 디지털 전환의 중요성과 함께 AI 개발을 위한 표준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표준화기구(ISO),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국제전기통신연합(ITU) 등 3대 국제표준화기구도 ‘표준이 책임감 있고 안전하며 신뢰할 수 있는 AI 개발을 위한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할 것’이라며 AI에 대한 표준 수립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AI는 향후 가전, 모바일, 자동차 등 다양한 제품에서 활용될 전망이다. 최근 들어선 제품에 내장돼 클라우드 없이 작동하는 ‘온 디바이스 AI’가 주목받고 있다. 이를 위한 AI 반도체의 수요도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AI 반도체가 AI 국제표준이 없는 채로 개발될 경우, 수출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 조성환 ISO 회장은 “반도체 선진국인 한국이 반도체 패권을 AI 반도체 분야에서도 유지하려면 AI 국제 표준 논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녹색 전환·경제 안보 분야에서도 뜨거운 감자 된 ‘표준’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한 녹색 전환 역시 표준 논의가 시급한 분야로 거론된다.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파리협정에 복귀했다. 국제사회의 탄소중립 정책도 빨라지고 있다.
제품별 탄소배출량 산정, 청정에너지 사용 확대, 제조‧운송 등 산업 활동에서 발생하는 탄소 저감 등 탄소 중립 달성에도 다양한 국제표준이 필요하다. 현재 93개국이 참여 중인 ISO 순환경제기술위원회를 중심으로 녹색 전환과 관련한 국제표준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최근 들어선 경제 안보 이슈 안에서 표준이 논의되고 있다. 자국보호주의 무역 기조가 강해지면서, 주요국이 표준 협력을 동맹국이나 우방국의 지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이 연이어 국가 표준 전략을 발표한 것 역시 기술 패권을 상대국에 넘겨주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국제 표준 경쟁이 치열해지는 지금 한국은 어떻게 대비하고 있을까. 한국은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을 계기로 글로벌 시장에서의 국가경쟁력 확보를 위해 2000년부터 국제표준화 활동을 강화해 왔다. 2001년부터는 국가표준기본법에 따라 매 5년 단위로 국가표준 기본계획을 수립해 발표하고 있다. 202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은 매년 국제표준을 80여건 제안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한국인 최초로 조성환 회장이 ISO 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국제무대에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이와 함께 지난해부턴 인공지능(AI), 반도체, 양자정보기술 등 12개 첨단산업 분야에 대한 ‘국가 표준 전략’ 마련에 착수한 상태다. 국가기술표준원과 한국표준협회는 오는 21일 열리는 ‘첨단산업 표준 리더십 포럼 총회’에서 첨단산업 국가표준화 전략을 발표한다. 이번에 발표되는 표준화 전략에는 ▲표준화 추진 기술 ▲국제 표준 협력 ▲표준 전문 인력 양성 방안 등이 담길 전망이다.
정부 관계자는 “국가의 기술혁신과 기술의 세계시장 선점을 위한 산업정책은 표준화 전략과 연동돼야 한다”면서 “디지털 전환과 녹색 전환은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미래 기술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로서 표준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024 표준포럼
2024 첨단산업 표준 리더십 포럼 총회
정부, 2030년까지 국제표준 250여건 제안 추진
“글로벌 표준 경쟁 앞서기 위한 첫걸음될 것”
"표준은 미래 기술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지름길.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기술 패권을 선점하기 위한 주요국의 경쟁이 가열되는 가운데, 정부가 K-표준 전략을 발표했다.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미래차, 디스플레이 등 12개 첨단산업 분야에서 표준 과제를 발굴해 2030년까지 국제 표준 250여건을 제안하는 등 표준화 논의를 선도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조선비즈와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국표원)은 21일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2024 첨단산업 표준 리더십 포럼 총회’를 개최했다. 국표원과 한국표준협회는 이날 총회에서 ‘첨단산업 국가표준화 전략’을 발표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오늘 발표한 국가표준화 전략은 첨단산업 분야의 치열한 표준 경쟁에서 앞서가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라며 “초격차 프로젝트 등 주요 산업 정책과 국제 표준화 전략을 연계해 우리 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한 정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총회 참석자들은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가운데, 첨단산업 분야에서 한국이 초격차 기술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으로 표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정부와 민관이 함께 표준전략을 수립하고 기술 발전에 대응함으로써 글로벌 시장을 선점하고, 국가와 기업의 성장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 정부, ‘첨단산업 국가표준화 전략’ 발표
이날 행사의 백미는 ‘첨단산업 국가표준화 전략’ 발표였다. 정부가 첨단산업에 대한 표준 전략을 수립해 발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민관이 함께 만든 ‘첨단산업 국가표준화 전략’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인공지능(AI) ▲미래차 ▲미래선박 ▲로봇 ▲첨단제조 ▲양자기술 ▲핵심소재 ▲원자력 ▲청정에너지를 미래 첨단산업 분야로 선정하고, 2030년까지 국제표준 250여건 개발을 추진하는 게 핵심이다.
분야가 다양한 만큼 전략 수립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지식경제부 차관, 보건복지부 장관 출신으로 첨단산업 표준 리더십 포럼의 공동의장을 맡은 임채민 법무법인 광장 고문은 “지난해 9월 표준포럼이 출범한 이후 8개월 동안 12개 산업군별로 표준화 전략을 만들었고, 리더십 포럼을 통해 방향과 골격을 조율했다”면서 “국가표준화 전략 발표는 한국이 국제 표준 선점을 위한 출발점에 섰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첨단산업 분야 국제 표준은 ▲초격차 유지 ▲신시장 확보 ▲국산화 지원 ▲미래기술 방향성 정립 등 4개 유형으로 나눠 개발된다. 정부는 우선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 중이고, 대규모 연구개발(R&D) 투자가 예정된 첨단산업 분야는 초격차 유지를 목표로 국제표준 개발을 추진한다.
국제 표준 논의 주도를 위한 국제협력 강화 계획도 반영됐다. 국제 표준 논의에서 한국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국제표준화기구(ISO)와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등 국제표준화기구 의장단 내 한국인의 진출을 적극 지원할 방침이다. 미국, 독일 등 주요 기술표준 강국과 표준포럼 및 양자회의 등을 통한 표준협력 파트너십도 강화한다.
기업의 표준화 활동 지원도 확대한다. 기업과 표준전문가를 연결해 표준 동향을 제공하고, 표준안 작성 자문 등 기업의 표준안 개발을 지원하는 사업을 확대한다. 기업을 중심으로 ‘세계표준포럼’을 신설해, 기후변화·AI 등 글로벌 이슈를 논의하는 장도 개최할 계획이다.
정부는 국가표준화 전략을 수립하면서 기술 변화에 맞춰 전략을 즉각적으로 수정할 수 있도록 전략 구조를 유연하게 구축했다. 임 고문은 “앞으로 많은 전문가들의 비판과 지적을 받아들여서 수정·보완해 나가면서 전략을 실행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 “AI 리스크, 표준이 ‘가드레일’ 돼야”… “신산업 밑그림 표준으로 그려야”
핵심 첨단산업인 AI와 반도체, 미래차 분야에 대한 세부적인 표준 전략도 이날 총회에서 발표됐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함상범 최고표준임원(전무)은 ‘인공지능 안전성과 표준’을 주제로 한 발표에서 “기업은 표준을 통해 책임 있는 AI 서비스를 개발하고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함 전무는 알파고와 챗GPT 등의 출현을 상징적 사건으로 들면서 “생성형 AI가 최근 2년 내 보여준 성과를 통해 인류에 앞으로 더 많은 기회와 동력을 제공해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다만 “사실이 아닌 사실을 믿게 만들거나, 특정 인종·종교에 편향된 정보를 제공하는 등 생성형 AI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며 “인간의 삶을 이롭게 하는 ‘안전한 방향’으로 AI를 사용하도록 하는 가드레일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보통신기술이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지금 이에 대처할 유연하고 기민한 정책·전략이 요구되며 여기엔 표준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주력산업인 반도체의 초격차 기술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제 표준 수립을 한국이 주도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김덕기 세종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차세대 반도체 중점 표준화 계획의 핵심은 연구개발(R&D)과 표준, 특허를 연계하는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라며 “반도체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반도체 산업에 대한 표준 활용 지원도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국내 선도 기술의 글로벌 시장 확산을 위해 기업·학계와 협력해 ▲첨단 패키징 기술 표준화 ▲국산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표준화 ▲에너지·모빌리티용 초고전압 화합물 전력 반도체 표준화 등 35건의 국제표준을 공식 제안할 방침이다.
미래차와 관련해선 신산업이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표준으로 산업 구조 청사진을 그려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최종찬 국표원 자율차 국가표준코디네이터는 “미래차 같은 완전히 새로운 시장의 경우, 백지에 산업을 새로 그리는 격”이라며 “해당 세계의 표준이 있어야만 관련 인프라 등이 구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 코디네이터는 “CV(Connected Vehicle·커넥티드카) 분야는 VTX(근거리통신망) 인프라가 필요하다”며 “통신·보안·데이터 등과 관련한 표준이 없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인프라 구축이 어렵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표준으로 산업을 스케치하고, 안정적인 산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겠다”면서 “구체적으로 2030년까지 국가표준 30건 제정, 국제표준 40건 제안을 목표로 미래차 표준화 전략을 추진할 것”이라고 했다.
포럼 공동의장인 조성환 ISO 회장은 총회 특별강연에서 “표준은 국가의 경제 성장률을 끌어 올리고, 기업의 수익성을 증대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한국 기업의 표준화 활동 참여도는 선진국 기업에 비해 떨어진다”며 “이번 총회를 계기로 더 많은 민간 분야가 표준 활동에 참여하고, 더 많은 전문가가 등장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첨단산업 표준 리더십 포럼 총회’는 미래 첨단산업의 국제 표준 전략을 공론화하기 위해 조성된 회의체다. 지난해 9월 12개 첨단산업 분야 민간 표준포럼이 조직됐고, 이날 첫 총회를 개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