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과 호주 등의 대형 은행들이 비트코인 등 디지털 자산을 통한 투자와 암호화폐 보관을 지원하는 서비스를 출시했다고 월스트리저널(WSJ)이 4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각국 금융 당국의 우려 속에 가상화폐에 부정적이던 유럽 은행들과 재정적으로 보수 성향이 짙은 독일 은행까지 고객의 지속적인 기대를 고려해 사업 범위를 확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스페인에서 자산 규모가 두 번째로 큰 BBVA는 최근 고객이 디지털 계정을 통해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을 보유하거나 구입 및 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중남미와 터키에서도 영업하는 이 은행은 해당 서비스가 특히 중남미 고객들에게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밝혔다.
호주 최대 은행인 커먼웰스도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시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은행은 암호화폐 거래소 ‘제미니’와 제휴해 고객이 은행 모바일 앱으로 암호화폐를 거래하고 보관할 수 있도록 했다. 우선 10종의 가상화폐를 거래할 수 있으며, 올해 안으로 서비스 대상을 확대할 계획이다.
특히 독일에서는 자국 인구 8000만명 중 5000만명을 고객으로 둔 독일저축은행 그룹이 ‘암호화폐 지갑’을 제공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가상화폐에 대한 독일인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보수적인 기조를 마냥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는 화폐에 대해 극도로 보수적인 독일 사회에서 암호화폐를 받아들이는 중요한 단계가 될 것이라고 WSJ는 전했다.
알렉산더 하트버그 독일저축은행 대변인은 “우리 고객 10명 중 1명은 암호화폐 등 가상 자산을 소유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며 “고객들의 높은 기대를 고려할 때 저축은행도 암호화폐 자산에 대한 수요와 서비스 제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주요 은행의 이러한 움직임은 각국 규제당국이 수년 간 가상화폐에 방어적 태도를 유지하며 자금세탁과 투자자 피해, 높은 변동성 등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는 가운데 나왔다. 기존 은행들도 소매 고객들에게 가상화폐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기를 꺼려왔다. 가상화폐 거래 관련 모든 정보를 보관하는 블록체인 자체가 은행의 전통적인 기능을 대체할 수 있도록 설계돼 은행의 독점적 지위를 흔들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당국과 은행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암호화폐의 가치와 거래량은 급증했다. 지난해 비트코인을 비롯한 모든 암호화폐의 시가총액은 전년 대비 2배 이상 성장해 2조 달러(약 2396조원)를 넘어섰다. 최근에는 결제 플랫폼 페이팔과 주식 거래 플랫폼 로빈후드 등 비(非)은행 결제 업체들이 암호화폐 관련 거래로 사업 분야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또 수탁은행과 글로벌 금융사들도 자산운용사와 헤지펀드 등 기관 고객을 대상으로 암호화폐 서비스를 속속 내놓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
= 이슬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