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의 개념이 바뀌고 있습니다. 모든 환자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치료했던 시대가 가고 개별 환자별로 맞춤 치료를 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환자의 유전체 정보와 방대한 임상 빅데이터 덕분입니다.”
9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헬스케어 이노베이션 포럼 2017’에는 국내외 전문가들이 총출동해 정밀의학(Precision medicine), 유전체학(genomics), 유전자가위, 혁신 신약(first-in-class), 디지털 헬스케어(digital healthcare) 등 헬스케어의 최신 동향과 미래 전망을 공유했다. 조선비즈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공동 주관한 이날 포럼에는 400명이 넘는 참석자들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
이날 기조 강연자들은 헬스케어 기술이 발전하면서 질병을 예방하고 생명을 연장시키는 정밀의학 기술이 헬스케어 산업의 혁신을 일으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이들은 개별 맞춤형 치료가 가계의 부담을 낮추고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한국 정부의 재정 건전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 “유전체는 헬스케어 혁신 주춧돌…유전자 분석·교정 기술 비약적 발전”
‘건강한 삶을 위한 혁신 기술의 도전’을 주제로 한 1세션 첫번째 기조강연자 에드가 맥빈(Edgar Macbean) 일루미나 글로벌사업개발 총괄은 “유전체 분석 비용은 ‘무어의 법칙(반도체 가격 하락 속도를 나타내는 법칙)’을 넘어설 정도로 빠르게 떨어졌다"면서 “이제 유전체학은 헬스케어부터 농업까지 우릐의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일루미나의 유전체 분석 장비로 이틀 만에 인간 유전자를 완벽하게 분석할 수 있다. 이 회사는 작은 장비 중에는 5억개의 DNA 조각들을 분석해 하나의 파일로 만들기도 한다.
같은 세션 2번째 기조 강연자인 김진수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장(서울대 교수)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의 최신 동향을 공유했다.
그는 “4세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술은 유전자 변이로 생기는 유전질환이나 에이즈, 바이러스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도구로 각광받고 있다”고 말했다.
김 단장은 “스탠퍼드대 연구진이 올해 5월말 국제학술지 '네이처 메소드'에 이른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로 생쥐 두 마리에서 실명(失明)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교정했더니,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유전자 돌연변이가 크게 늘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면서 “하지만, 이 연구과정에는 오류가 많았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김 단장은 “결론적으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술은 오프타깃(다른 변이가 일어날 가능성)이 극히 적으며, 오프타깃을 측정하고 제어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같은 세션 3번째 기조 강연자인 존 매틱(John Mattick) 호주 가반 연구소(RNA Biology and Plasticity Lab) 소장도 유전자 분석 기반의 의료 시스템을 강조했다. 그는 유전체 정보 데이터베이스를 국가가 확보해 운영하면서 의료 기관에 제공할 경우, 획기적인 의료 혁신이 일어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매틱 소장은 “호주에 혈액 질병을 앓고 있던 시한부 판정을 받은 알렌이라는 아이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장기 출혈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며 “의료진이 손을 쓰지 못하다가 유전자 분석을 통해 면역체계에서 자가면역 부분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알렌에게 유전적인 변이를 가해 치료 효과를 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박웅양 삼성서울병원 유전체연구소장은 “유전체 정보, 임상 정보, 생활 정보는 전 생애 주기에 걸쳐 개인별 맞춤형 헬스케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밀의료의 핵심 기반”라면서 “인공지능에 기반한 예측모델을 통해 예방 치료에 투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표적 치료’에도 골든 타임 있어”…국내 기업, 혁신 사례 대거 발표
‘혁신사례로 본 헬스케어 미래'를 주제로 한 2번째 세션 기조 강연자인 인고 샤크라바티(Ingo Chakravarty) 나비칸(Navican) 최고경영자(CEO)는 “표적 정밀 치료에도 골든 타임이 있다”면서 “조기에 표적 정밀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치료 효과를 높이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샤크라바티 CEO는 기술 발달로 표적 정밀 치료가 가능해졌지만, 이런 치료법을 설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암 환자 50만명 가운데, 표적 정밀 치료 설명을 듣고 치료법을 바꾸는 사람은 5%에 불과하다"면서 “4기 판정을 받은 암 환자가 1차, 2차, 3차까지 계속 화학요법 치료를 시도하다 이후 표적 정밀 치료를 찾는데, 그때는 이미 건강이 악화돼 환자도 지치고 돈과 시간도 다 써버린 상태가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비칸은 유전체 서열 분석부터 개인 맞춤형 치료법까지 정밀의학에 관한 기술 및 서비스, 시스템을 ‘턴키 방식(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책임지고 마친 뒤 발주자에게 넘겨 주는 방식)’으로 개발해 전 세계 의료기관에 제공하고 있다”며 “전 세계 많은 암 환자들이 정밀의학의 혜택을 보도록 하는 게 이 사업의 핵심”이라고 덧붙였다.
두번째 세션에서 이어진 국내 헬스케어 시장의 혁신가들의 사례 발표는 청중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김수정 코오롱생명과학 연구소장은 국내 최초의 유전자 골관절염 치료제인 '인보사 케이 주' 개발 과정과 향후 목표에 대해 설명했다. 김 연구소장은 “골관절염 환자는 전 세계적으로 1억5000만명 수준에 달하며, 국내에만 500만명이 있다”면서 “지난 10년간 임상시험과 검증을 거쳐 치료 효과가 확인된 인보사로 몇 년 후 4조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장애인 재활로봇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로 주목받고 있는 공경철 서강대 기계공학과 교수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연구팀과 공동으로 보행 보조 로봇 ‘워크온’을 개발, 작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제1회 사이배슬론’ 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다. 사이배슬론은 작년 처음 시작된 대회로 스위스 국립로봇역량연구센터가 주최하는 로봇 관련 경진대회다.
공 교수는 “로봇 개발팀과 의료팀과의 협력이 중요한데, 이는 공학과 의료가 융합돼야 했기 때문”이라며 “알고리즘에 대해서는 공학자들, 몸에 대해서는 의료진의 주장이 하나로 모여서 보행 보조 로봇 워크온이 탄생했다”고 말했다.
박찬희 C&C신약연구소 탐색연구센터장은 글로벌 혁신 신약 개발 현황과 한일 연구·개발 협력 모델을 소개했다. C&C신약연구소는 한국 JW중외제약과 일본 쥬가이제약이 절반씩 투자해 1992년부터 혁신 신약 개발을 연구해 온 기업이다.
JW중외제약이 보유한 인재들이 쥬가이제약의 연구 노하우를 공유받아 협력해 연구하고 있다. 한국 제약사의 연구 인력과 일본의 주요 연구 기술이 협력한 모델로 순전히 연구만을 위한 이런 협력 형태는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모델이다.
김민열 헬스케어챗봇 대표는 ‘인공지능 헬스케어 챗봇 개발’을 주제로 헬스케어 챗봇 산업 전망을 발표했다. 그는 “헬스케어 챗봇에 제약 고객사의 데이터, 임상시험 데이터를 비롯해 웨어러블 기기에서 측정할 수 있는 헬스케어 데이터 등이 합쳐지면 헬스케어 챗봇 산업의 성장 가능성이 높다”며 “이런 것들은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세계적인 IT(정보기술) 회사와 제약사, 병원 등과 협력해야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전복환 대웅제약 바이오센터장은 “‘지난해 설립된 대웅 바이오센터는 필요한 인력과 비용 등을 줄이고 연구 효과를 높일 수 있도록 만든 ‘스마트 워크 시스템’이 도입된 연구실이자 생산기지”라며 운영 원칙을 소개했다.
◆ “적합한 규제가 기술 혁신 촉진…인공지능 시대 대비해야”
‘혁신 친화적인 바이오헬스 산업 규제 개선’이라는 주제로 열린 마지막 3번째 세션에서 이명화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연구기획팀장은 “적합한 규제가 기술 혁신을 촉진한다”며 “바이오와 헬스케어 분야에서 혁신적 제품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사전 규제’에서 기업이 스스로 위험을 규제할 수 있게끔 ‘사후 규제’ 방식으로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 팀장은 “세계적으로 바이오와 헬스케어 분야에서 임상시험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만 한국은 많은 규제로 연구활동에 제약이 많다”면서 “미국은 이미 정밀의료 치료법을 만들었고, 일본도 인공지능(AI)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AI와 연계한 헬스케어 사업을 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경우) 바이오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기술 혁신을 대비해 규제책 정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영선 경희대학교 동서의학대학원 교수는 “4차 산업혁명에서 유망한 헬스케어 산업의 일자리는 늘어날 것”이라며 “헬스케어 혁신(이노베이션)으로 사회경제적 생산성이 올라가고 일자리가 창출되면 경제성장에서 선순환 구조를 가져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이어 “4차 산업혁명의 기술 측면에서 헬스케어 산업은 성장 잠재력이 높다”면서 “헬스케어 산업의 일자리 증가율은 매년 3%에 달하며, 이밖에 헬스케어 로봇 산업, 헬스케어 서비스 등 일자리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선경 오송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이사장의 사회로 혁신 친화적인 바이오헬스 산업 규제 개선 방향에 대한 전문가들의 오픈 토크도 진행됐다 .
문여정 인터베스트 이사는 “정부나 업계 전문가들이 의사들이 창업을 해야한다고 주장하지만 한국의 포지티브 규제(허용 사업 외에는 규제하는 방식) 때문에 창업이 필요한 부분이 있더라도 의사들이 나서기 쉽지 않다”며 “이런 이유 때문에 비즈니스 모델로서의 확장성이 있더라도 병원에 있는 교수가 바깥의 기업과 협업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어 헬스케어사업 확장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김남국 서울아산대병원 교수는 “대부분 국내 창업자들은 우리나라 규제의 애매함 때문에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놓여있다”고면서 “규제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규제를 너무 쉽게 생각해서도 안된다”며 “과거 LED 연구의 경우 규제를 풀었더니 중국 저가 전구가 들어와서 국내 산업 자체가 망한 교훈도 새길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정훈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는 “한국 규정상 생명의 위급, 희귀 질환이 아니면 유전자 교정 기술 임상에 대한 제한을 받는다”며 “한국이 생체 유전자 논문을 먼저 게재했지만, 중국이 먼저 연구 임상을 시작하는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좌장을 맡은 선경 이사장은 “생명윤리와 직결된 부분에서는 규제가 필요하지만 신기술 도입과 신산업 확대에 있어서는 유연한 정책이 필요하다”며 “문재인 케어가 산업화를 억제하지 않으며 헬스케어 산업의 발전을 이끌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제언했다.
강인효 기자 / 허지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