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도시는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다른 도시의 모델을 베끼려고 하지 말고, 한국만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조직원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근무환경을 만들어보세요.”
아마존, 텐센트, 삼성전자, 네이버,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혁신기업의 사옥 설계를 도맡아 온 세계적인 건축설계회사 NBBJ의 로버트 맨킨(Robert Mankin) 공동대표는 한국 기업에 이렇게 조언했다.
NBBJ는 미국 경제 월간지 패스트컴퍼니가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선정할 만큼 과감한 시도로도 유명한 건축설계회사다. 패스트컴퍼니는 혁신 기업을 소개하는 권위지다.
21~22일 조선비즈가 개최한 ‘스마트클라우드쇼 2016’ 연사로 한국을 찾은 맨킨 공동 대표는 삼성전자, 텐센트, 알리바바,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보잉 등 글로벌 대기업의 사무공간 설계를 두루 맡으며 명성을 쌓아왔다. 다음은 맨킨 대표와의 일문일답.
―근무환경이 조직 혁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근무환경은 직원들의 행동을 바꿉니다. 건물이 바뀌면 사람들의 협력과 상호소통 양상이 달라지니까요. 노르웨이의 통신회사 텔레노르(Telenor)는 원래 건물이 20~30개로 나뉘어 있어 회의나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옥을 하나로 통합했는데, 그 뒤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습니다.
사옥을 지을 때 직원들이 한 자리에 앉아 일하도록 한 게 아니라 자리를 특정하지 않았거든요. 전 세계에서 가장 자유공간이 많은 건물로 지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기 시작했고, 실적도 좋아졌습니다. 사실 사옥 리모델링이 기업 실적에 미치는 영향을 수치로 계량화해서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지요. 그러나 근무환경 공간의 변화로 통해 기업의 회의 문화, 협업 문화가 완전히 바뀌는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유명 대기업의 사옥 설계를 도맡아 진행했습니다.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있나요.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도시와의 조화를 추구한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도시 외곽, 변두리 넓은 부지에 공간을 갖고자 했다면 요즘은 도심 한복판에도 자리잡습니다. 수직적인 건물을 지으면서도 개방적인 공간을 만드는 추세지요. 직원들도 도시의 일부가 되어 다양한 시설물을 이용하도록 하고, 기업 자체도 대중과 소통하고자 하는 거지요.
좋은 예로는 최근 진행한 중국 텐센트의 사옥 건축을 예로 들겠습니다. 중국 선전에 사무실을 건축하고 있는데, 수직과 수평의 조화를 추구합니다. 수직적으로는 직원들이 업무를 보는 공간을 만들면서, 보안에 무리가 없는 선에서 도시와의 조화를 위해 일반인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넓게 만드는 겁니다.
아마존도 재미있지요. 기술기업으로는 보기 드물게 대중에게 개방적인 건물입니다. 도시를 오가는 시민이 누구든 로비 안팎을 오갈 수 있습니다. 저마다 개성을 드러내는 독특한 외관을 추구하긴 하지만, 공통적으로 도시와의 조화를 추구하는 게 눈에 띕니다.”
― 삼성전자과 현대차그룹 등 한국 대기업의 사옥 설계도 맡고 있는데요, 글로벌 기업들과 요구사항에 차이가 있나요.
“사실 삼성전자와의 프로젝트가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한국 수원캠퍼스, 그리고 실리콘밸리 사옥 건설을 진행했는데요, 같은 회사인데도 완전히 다른 요구사항을 반영했습니다. 수원캠퍼스는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방식으로 지었습니다. 업무 공간에 더 집중한 형태지요.
실리콘밸리 사옥은 다릅니다. 숨 쉬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을 최대한 넓게 확보했습니다. 중앙이 개방돼 여러 사무공간이 서로를 바라보는 형태로 지었죠. 아무래도 채용하는 직원의 성향에 맞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실리콘밸리의 다른 기업 사옥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참신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로 구축했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현대차그룹의 경우, 삼성전자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좀 더 구조화된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 기업은 대체로 업무와 생산성에 집중하는 환경을 중시하는 편입니다. 아마존, 텐센트 등 글로벌 기술기업은 카페테리아나 운동시설, 로비처럼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공간을 늘려가는 추세지요. 반면 한국 기업들이 요구하는 공유 공간 비중은 훨씬 작습니다.”
―그런 차이가 혁신이 일어날 가능성에도 영향을 줄까요.
“사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한국 기업은 사옥에 대해 ‘일터’라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강한 편입니다. 그런데 사실 책상에 앉아 있는 행위와 생산성에는 큰 연관이 없다는 연구결과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지요. 오히려 더 움직이고, 다양한 사람과 마주치면서 새로운 생각을 나눌 수 있는 환경이 혁신을 만듭니다. 더 많은 기업들이 카페나 체육관 등 서로 다른 업무를 하는 직원이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있는 거지요.”
―NBBJ는 뇌과학, 행동 데이터 등을 설계에 반영하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실제로 어떤 식으로 건물에 반영하나요.
“사무공간 디자인은 사람의 행동 양상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광은 사람의 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동선은 어떤 영향을 주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공간을 배치해보고, 사람들이 어떻게 마주칠 수 있는지 사전에 계산하지요.
아마존, 삼성전자 실리콘밸리 사옥 등 최근에 지은 건물에는 모두 이런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 적용됐습니다. 다만 모두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스트레스가 많을 때 이를 줄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어떤 방법이 있을지를 연구했는데, 아마존 사옥에는 좀 더 자연을 많이 접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삼성전자 실리콘밸리 사옥에는 사람이 더 많이 움직일수록 스트레스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이용해 다양한 방법으로 이동하고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데 중점을 뒀습니다.”
―기업 사옥 건축에서 가장 중시하는 요소가 있다면요.
"저는 이동성(mobility)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텐센트를 예로 들면, 사옥의 전체 공간 가운데 40%를 직원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기업 사옥에서는 로비나 공유 공간이 아랫층에 있고 업무 공간이 윗층에 쏠려 있지요. 그러나 텐센트에서는 건물의 상층부, 중층부, 하층부에 고르게 공유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건물 곳곳을 돌아다니며 일하고 최대한 다양한 사람과 만날 기회를 만드는 겁니다.
또 중시하는 요소는 건물 자체가 그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드러내도록 하는 겁니다.
텐센트의 경우 중국에서 세계로 부상하는 글로벌 혁신 기업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사옥을 세우기 위해 미래적인 요소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은 외적으로 브랜드를 강화하는 요소가 되겠죠. 최대한 에너지 효율이 좋고 자연광이 잘 드는 친환경적인 건물로 만들면서 지속가능한 성장에 대한 사고방식을 함께 반영했습니다. 이처럼 건물 자체에 반영된 기업의 브랜드 가치와 정신은 조직원들의 애사심에도 큰 영향을 줍니다.”
―한정된 공간과 비용 때문에 고민하는 한국 기업이 어떻게 하면 혁신적인 근무환경을 만들 수 있을까요.
“아마 한정된 공간과 자금이라는 문제는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나 비슷한 고민일 겁니다.(웃음) 저는 15년 동안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한국에서 많은 작업을 해오면서 한국의 도시를 대단히 좋아하게 됐습니다. 건물이 매우 밀집돼 있는데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연결성이 좋아요. 단점처럼 보이지만, 짧은 이동만으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면에서 대단히 훌륭한 이점입니다.
한국 기업에 할 수 있는 조언은 다른 나라, 혹은 도시의 모델을 베끼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지금 있는 도시의 특성을 살펴보고 활용하는 게 중요합니다. 한국에서는 연결성을 조금만 강화하면 경제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중요한 것은 직원들에게 다양한 선택권을 줄 수 있는 공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도 한국 기업의 활약은 대단하지만, 더 많은 한국 기업이 공간 혁신을 통해 진화하는 모습을 기대합니다.”